명예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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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예 혁명은 1688년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가톨릭 신자였던 제임스 2세의 전제 정치 시도와 종교 정책에 반발한 의회가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를 공동 국왕으로 추대하고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킨 사건이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우대 정책과 왕권 강화 시도로 의회와 갈등을 빚었으며, 윌리엄 3세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초청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상륙하여 제임스 2세를 몰아냈다. 이 혁명은 1689년 권리장전의 제정을 통해 입헌군주제의 기반을 마련하고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여, 영국의 정치 체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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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8년 잉글랜드 - 신교 자유령
신교 자유령은 1687년과 1688년 제임스 2세가 발표한 종교적 관용 선언으로,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며 종교적 자유를 부여했지만 명예혁명으로 무효가 되었다.
명예 혁명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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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혁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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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글로리어스 레볼루션 (Glorious Revolution) (영어) An Réabhlóid Ghlórmhar (아일랜드어) Rèabhlaid Ghlòrmhor (스코틀랜드 게일어) Chwyldro Gogoneddus (웨일스어) Glorieuze Overtocht (네덜란드어, '영광스러운 건너감' 또는 '영광스러운 이동'이라는 뜻) |
발생 위치 | 브리튼 제도 |
날짜 | 1688년 ~ 1689년 |
결과 | 가톨릭 군주 제임스 2세 폐위 개신교 신자인 딸 메리 2세와 그의 남편 윌리엄 3세의 공동 즉위 |
주요 목표 및 배경 | |
목표 | 스튜어트 왕조의 전제 정치 타도 가톨릭 세력의 배제 잉글랜드의 대프랑스 동맹에서 대네덜란드 동맹으로의 전환 |
배경 |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정책에 대한 반발 의회의 권한 강화 요구 프랑스의 위협에 대한 우려 성공회 신자들의 정치적 불안감 |
주요 참여 세력 | |
주요 인물 | 윌리엄 3세 (오라녜 공, 네덜란드 총독) 메리 2세 (제임스 2세의 딸) 제임스 2세 (잉글랜드 국왕) |
참여 세력 | 영국 의회 성공회 지지자 네덜란드 군대 |
결과 및 영향 | |
결과 |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의 공동 즉위 권리 장전 발표 입헌군주제 및 의회민주주의 확립 잉글랜드-프랑스 군사 동맹 해소 및 대동맹 전쟁 발발 제2차 백년 전쟁의 시작 |
영향 | 영국의 정치 체제 변화 의회 권한 강화 가톨릭 세력의 영향력 감소 영국의 국제적 위상 강화 네덜란드와의 관계 강화 |
기타 | |
특징 | '무혈' 혁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소규모 전투와 충돌이 있었음. |
별칭 | '무혈 혁명' (Bloodless Revolution) '1688년 혁명' (Revolution of 1688) |
2. 배경
제임스 2세는 즉위 이전부터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 왕권과 의회 간의 대립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했다.[1]
1685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반란은 제임스 2세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으나, 영국 성공회와 스코틀랜드 교회의 우위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제임스 2세를 지지했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지 세력들은 그의 정책으로 인해 등을 돌리게 되었다.
스튜어트 정치 이데올로기는 1603년 제임스 6세 겸 1세로부터 유래했는데, 신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군주가 통치하고, 의회는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왕과 의회 간의 이러한 분쟁은 삼국 전쟁으로 이어졌고, 1660년 스튜어트 왕정 복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679년부터 1681년까지의 왕위 계승 배제 위기는 제임스를 왕위에서 ‘배제’하려는 휘그당과 반대파인 토리당으로 영국 정치 계급을 분열시켰다. 그러나 당시 제임스 2세는 52세였고, 모데나의 메리와의 결혼 후 11년 동안 자녀가 없었으며, 상속인은 그의 프로테스탄트 딸인 메리와 앤이었기에 이 문제는 단기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스튜어트 상속자’에 대한 공감대가 컸고, 1681년 계승법은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그를 지지해야 할 의무를 확인했다.
1685년 제임스 2세를 지지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 대부분은 기존의 정치적, 종교적 체제를 유지하기를 원했지만, 아일랜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일랜드에서는 종교 문제뿐 아니라, 가톨릭 신자들에게 군 복무나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과 토지 개혁 문제도 중요했다. 1600년 아일랜드 토지의 90%는 가톨릭 신자들이 소유했지만, 17세기 일련의 몰수를 거친 후 1685년에는 22%로 떨어졌다.[1] 더블린 등지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상인들은 영국 경쟁업체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하는 통상 제한에 반대했다.
2. 1. 종교 갈등
제임스 2세는 재위 기간 동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 그리고 왕권에 대항하는 의회와의 갈등이라는 두 가지 큰 문제에 직면했다.1679년과 1681년에는 저교회파(복음주의 노선) 성공회 신자들의 정당인 휘그당이 제임스 2세의 폐위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제임스 2세는 고교회파 노선 성공회 신자들의 정당인 토리당을 지원했지만, 종교적 관용을 내세워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관리로 채용하고 심사율을 무력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영국 성공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1687년 제임스 2세는 양심의 자유 선언을 통해 로마 가톨릭과 비국교도에 대한 억압을 철폐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임스 2세의 종교 정책은 1685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프랑스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한 사건과 맞물려, 프로테스탄트들에게 가톨릭 반종교개혁의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2. 2. 의회와의 갈등
제임스 2세는 재위 3년 동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 그리고 왕고소장에 대항하는 의회와의 갈등이라는 두 가지 큰 문제에 직면했다. 제임스 2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왕권 강화를 추구했는데, 이는 의회의 권한을 제한하고 전제 정치를 펼치려는 시도로 해석되어 의회의 반발을 샀다.[9]1686년 제임스 2세는 '국왕 법정'을 개최하여 심사율 폐지를 강요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개신교도 교직원을 해고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그는 런던 주교이자 대표적인 로마 가톨릭 반대자인 헨리 콤프튼을 퇴위시키고, 옥스퍼드 대학교 맥달런 컬리지의 개신교도 교직원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를 로마 가톨릭 신자들로 채웠다. 또한 의회의 동의 없이 많은 로마 가톨릭 신도들을 상비군으로 고용하고, 수도 근교인 하운슬로우에 3만 4천여 명의 상비군을 주둔시켰다.
1688년 제임스 2세는 모든 교회에서 양심의 자유 선언을 낭독하라는 칙령을 내렸는데,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샌크로프트를 비롯한 7명의 주교가 이를 거부하여 수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공개 재판에서 런던 군중들은 그들에게 무죄를 외쳤다.
3. 음모
1686년 "스튜어트 왕가의 폭군"을 무너뜨리려는 음모자들이 도세트 주 차버러프 하우스에 모였다.[9] 1688년 6월, 더비사이어 주 체스터필드에서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메리와 윌리엄 부부에게 왕위를 넘기기 위한 봉기가 일어났다. 윌리엄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으로서 프랑스에 대항하며 유럽 개신교의 대표자로 명성을 얻고 있었고,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옹호와 의회 무시는 윌리엄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윌리엄은 1687년 4월 사절을 통해 토리당과 휘그당 지도자들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자신의 계획을 알리고,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잉글랜드의 군사력 동원을 요청했다. 1687년 9월에는 영국 백성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제임스 2세의 종교 정책 중단을 촉구했다.[14]
1688년 4월, 루이 14세는 영국 해협(English Channel)에서 왕립 해군을 지원할 계획을 발표했고, 제임스는 이를 부인했지만 네덜란드는 군사 개입을 준비했다. 7월, 총회는 추가 병력과 군함을 승인했다.
윌리엄의 침공 성공은 국내 지지 여부에 달려 있었고, 4월 말 윌리엄은 휘그 반대파와 만나 공식적인 초청장을 요청했다. 6월, “윌리엄 초청장”이 작성되었고, 댄비, 데번셔, 런던 주교 헨리 컴프턴, 슈루즈베리, 럼리, 러셀, 시드니 등이 서명했다. 이들은 네덜란드 상륙 지원을 약속하며 신속한 행동을 강조했다.[14] 초청장은 6월 30일 헤이그로 전달되었고, 벤팅크는 영국에서 선전 운동을 시작했다.
찰스 2세와 요크 공 제임스는 라이하우스 음모 사건과 몬머스 반란 진압 후의 “피의 순회 재판”으로 인해 인기를 잃었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들을 중용하고 프로테스탄트 장관들을 해임하여 의회와 대립했다.
제임스 2세가 상비군을 설치하고, 1688년 6월 10일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태어나자 의회는 제임스 2세와의 대결을 결심하고, 오라녜 공 빌헬름 3세(윌리엄 3세)와 메리 부부에게 잉글랜드 상륙을 요청했다.
빌헬름 3세는 프랑스를 위험시하고 프랑스 포위망을 구축하기 위해 친프랑스적인 영국을 반프랑스·친네덜란드 쪽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1686년부터 영국의 일부 정치가들이 네덜란드로 건너가 빌헬름 3세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다.[9]
1688년 6월 30일, 윌리엄 3세는 7명의 귀족 (찰스 탈보트, 윌리엄 캐번디시, 토마스 오즈번, 리처드 램리, 헨리 컴프턴, 에드워드 러셀, 헨리 시드니)의 초청을 받아 영국 의회의 요청에 동의했다.
7월부터 준비가 시작되어 9월에 윌리엄 3세는 독일 제후들에게 원군 제공을 확보하고, 네덜란드 방어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에게 맡겼다. 루이 14세는 9월 25일 라인 강 지역에 프랑스군을 파병하여 대동맹 전쟁을 시작했고, 윌리엄 3세는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즉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 9월 29일 영국 원정 계획을 발표했다. 10월 8일 연방 의회도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10월 9일 윌리엄 3세는 상륙이 영국 국민의 권리 회복이라는 취지의 팜플렛을 대량 인쇄하여 비밀리에 보관했다.[10]
원정군은 윌리엄 3세가 사령관, 프레데릭 쇤베르크가 부사령관, 아서 허버트가 함대 사령관을 맡았다. 7명 중 슈루즈베리, 러셀, 시드니 3명이 동행했고, 찰스 모돈트, 길버트 버넷, 윌리엄 벤팅크도 참여했다. 제임스 2세도 가톨릭 정책을 철회하고 네덜란드군의 원정을 발표하며 국토 방위를 촉구했지만, 주변은 동요가 확산되고 있었다.[10]
3. 1. 반기를 든 의회
1686년 제임스 2세는 심사율 폐지를 강요하며 성공회의 고위 성직자들을 로마 가톨릭 신자로 교체하고, 상비군을 늘리는 등 의회의 동의 없이 권력을 남용했다.[14] 1688년에는 모든 교회에 양심의 자유 선언을 낭독하라는 칙령을 내려 캔터베리 대주교를 비롯한 주교들을 수감했으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같은 해 제임스 2세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왕국이 세워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토리당과 휘그당은 동맹을 맺고 제임스 2세에 대항했다.
1686년 "스튜어트 왕가의 폭군"을 무너뜨리려는 음모자들이 도세트 주 차버러프 하우스에 모였다. 1688년 6월, 더비사이어 주 체스터필드에서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메리와 윌리엄 부부에게 왕위를 넘기기 위한 봉기가 일어났다. 윌리엄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으로서 프랑스에 대항하며 유럽 개신교의 대표자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옹호와 의회 무시는 윌리엄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윌리엄은 1687년 4월 사절을 통해 토리당과 휘그당 지도자들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자신의 계획을 알리고,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잉글랜드의 군사력 동원을 요청했다. 1687년 9월에는 영국 백성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제임스 2세의 종교 정책 중단을 촉구했다.
1688년 4월, 루이 14세는 영국 해협(English Channel)에서 왕립 해군을 지원할 계획을 발표했고, 제임스는 이를 부인했지만 네덜란드는 군사 개입을 준비했다. 7월, 총회는 추가 병력과 군함을 승인했다.
윌리엄의 침공 성공은 국내 지지 여부에 달려 있었고, 4월 말 윌리엄은 휘그 반대파와 만나 공식적인 초청장을 요청했다. 6월, “윌리엄 초청장”이 작성되었고, 댄비, 데번셔, 런던 주교 헨리 컴프턴, 슈루즈베리, 럼리, 러셀, 시드니 등이 서명했다. 이들은 네덜란드 상륙 지원을 약속하며 신속한 행동을 강조했다.
초청장은 6월 30일 헤이그로 전달되었고, 벤팅크는 영국에서 선전 운동을 시작했다.
찰스 2세와 요크 공 제임스는 라이하우스 음모 사건과 몬머스 반란 진압 후의 “피의 순회 재판”으로 인해 인기를 잃었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들을 중용하고 프로테스탄트 장관들을 해임하여 의회와 대립했다.
제임스 2세가 상비군을 설치하고, 1688년 6월 10일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태어나자 의회는 제임스 2세와의 대결을 결심하고, 오라녜 공 빌헬름 3세(윌리엄 3세)와 메리 부부에게 잉글랜드 상륙을 요청했다.
빌헬름 3세는 프랑스를 위험시하고 프랑스 포위망을 구축하기 위해 친프랑스적인 영국을 반프랑스·친네덜란드 쪽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1686년부터 영국의 일부 정치가들이 네덜란드로 건너가 빌헬름 3세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다.[9]
1688년 6월 30일, 윌리엄 3세는 7명의 귀족 (찰스 탈보트, 윌리엄 캐번디시, 토마스 오즈번, 리처드 램리, 헨리 컴프턴, 에드워드 러셀, 헨리 시드니)의 초청을 받아 영국 의회의 요청에 동의했다.
7월부터 준비가 시작되어 9월에 윌리엄 3세는 독일 제후들에게 원군 제공을 확보하고, 네덜란드 방어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에게 맡겼다. 루이 14세는 9월 25일 라인 강 지역에 프랑스군을 파병하여 대동맹 전쟁을 시작했고, 윌리엄 3세는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즉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 9월 29일 영국 원정 계획을 발표했다. 10월 8일 연방 의회도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10월 9일 윌리엄 3세는 상륙이 영국 국민의 권리 회복이라는 취지의 팜플렛을 대량 인쇄하여 비밀리에 보관했다.
원정군은 윌리엄 3세가 사령관, 프레데릭 쇤베르크가 부사령관, 아서 허버트가 함대 사령관을 맡았다. 7명 중 슈루즈베리, 러셀, 시드니 3명이 동행했고, 찰스 모돈트, 길버트 버넷, 윌리엄 벤팅크도 참여했다. 제임스 2세도 가톨릭 정책을 철회하고 네덜란드군의 원정을 발표하며 국토 방위를 촉구했지만, 주변은 동요가 확산되고 있었다.[10]
3. 2. 오라녜 공 윌리엄

윌리엄은 1년여에 걸쳐 영국 정치에 영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687년 4월, 윌리엄은 사절을 영국의 토리당과 휘그당 지도자들에게 보내 비밀 편지를 전달하였다. 그는 사절을 통해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으나, 만약 전제정치에 반대하려고 한다면 자신은 왕족의 권리를 사용하여 그들과 함께할 것임을 약속했다. 윌리엄은 그 대가로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잉글랜드의 군사력 동원을 요청하였다. 이는 윌리엄이 새로운 가톨릭 왕위 후계자 때문에 늦어도 11월까지 영국을 침공하기로 협약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1688년 4월, 영국과 프랑스가 항로에 있는 함대의 지원에 대해 상호 합의를 맺었기에, 윌리엄은 군사적, 정치적, 재정적 지원을 받기 위해 필사적이었다.[14]
1687년 9월, 윌리엄은 네덜란드의 수석 행정관 가스팔 파겔을 통해 영국 백성을 향한 공개 편지를 배포하였다. 여기서 그는 제임스 2세의 종교적 관용 정책 중단을 촉구하였고, 이는 암묵적으로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4. 침공 계획
1688년 6월 30일[15] 제임스 2세에 의해 수감되었던 "불멸의 7인"(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와 6명의 주교)이 윌리엄에게 편지를 보냈다. 윌리엄은 이를 명분으로 자신의 거사가 외국 군대의 침략이 아니라 폭군으로부터 개신교도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윌리엄의 절친한 친구였던 한스 윌럼 벤팅크는 잉글랜드 전역에 팜플렛을 배포하여 윌리엄의 명분을 선동하였다. 이 팜플렛에는 윌리엄이 스튜어트 왕가의 일원이며, 그만이 스튜어트 왕가의 전제 정치와 타락, 그리고 가톨릭 편애를 중단시킬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10] 많은 자발적인 후원자들이 윌리엄을 위해 모여들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영국의 가톨릭 신도에 대한 박해가 없을 것과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는 것을 전제로 윌리엄을 지지하기로 하였다.(5월 협약)[10] 1688년 9월 4일 신성로마제국은 네덜란드 공화국과 동맹하여 프랑스에 대항하기로 하였다.[10] 하노버 공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와 작센의 선제후 존 조지 3세 역시 윌리엄을 지지하였다.
윌리엄은 암스테르담의 지원을 받기 위해 어려운 협상을 벌였다.[10] 벤팅크는 400척의 수송선과 13,616명의 독일 용병을 모집했고, 네덜란드 용병도 준비되었다.[10] 윌리엄은 유대인 은행가 프란시스코 로페스 수아소로부터 자금을 빌렸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도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견제하기 위해 자금을 빌려주었다.[10]
네덜란드 귀족들은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두려워하여 윌리엄의 침공을 미루었다. 그들은 네덜란드 군대가 잉글랜드에 있는 동안 프랑스가 플랑드르를 통해 공격해 올 가능성을 염려했다. 루이 14세는 1688년 9월 9일 제임스 2세를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와 프랑스가 독일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친서를 전달했다. 윌리엄은 이 편지를 통해 프랑스가 즉각적으로 네덜란드를 침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1688년 9월 22일, 루이 14세는 프랑스 항구에 있는 모든 네덜란드 선박의 출항을 금지하였으나, 이는 단순한 경고에 불과했다. 1688년 9월 26일, 암스테르담 의회는 영국 침공을 공식 승인하였다. 루이 14세는 군대를 린을 지나 독일 안으로 이동시켰고, 윌리엄은 군대를 서쪽 해안에 집결시켰다. 1688년 9월 29일, 홀란트 주 의회는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1672년의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 공격과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윌리엄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2]
4. 1. 명분
1688년 6월 30일[15] 제임스 2세에 의해 수감되었던 "불멸의 7인"(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와 6명의 주교)이 윌리엄에게 보낸 편지가 도착하자, 윌리엄은 이를 명분으로 자신의 거사가 외국 군대의 침략이 아니라 폭군으로부터 개신교도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윌리엄의 절친한 친구였던 한스 윌럼 벤팅크는 잉글랜드 전역에 팜플렛을 배포하여 윌리엄의 명분을 선동하였다. 이 팜플렛에는 윌리엄이 스튜어트 왕가의 일원이며, 그만이 스튜어트 왕가의 전제 정치와 타락, 그리고 가톨릭 편애를 중단시킬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10] 많은 자발적인 후원자들이 윌리엄을 위해 모여들었다.4. 2. 동맹
5월, 윌리엄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협약을 맺었다. 레오폴트 1세는 영국의 가톨릭 신도에 대한 박해가 없을 것과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는 것을 전제로 윌리엄을 지지하기로 하였다.[10] 9월 4일 신성로마제국은 네덜란드 공화국과 동맹하여 프랑스에 대항하기로 하였다.[10] 하노버 공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와 작센의 선제후 존 조지 3세 역시 윌리엄을 지지하였다.[10]윌리엄은 암스테르담의 지원을 받기 위해 어려운 협상을 벌였다.[10] 벤팅크는 400척의 수송선과 13,616명의 독일 용병을 모집했고, 네덜란드 용병도 준비되었다.[10] 윌리엄은 유대인 은행가 프란시스코 로페스 수아소로부터 자금을 빌렸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도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견제하기 위해 자금을 빌려주었다.[10]
4. 3. 임박한 전쟁
네덜란드 귀족들은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두려워하여 윌리엄의 침공을 미루었다. 그들은 네덜란드 군대가 잉글랜드에 있는 동안 프랑스가 플랑드르를 통해 공격해 올 가능성을 염려했다. 루이 14세는 9월 9일 제임스 2세를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와 프랑스가 독일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친서를 전달했다. 윌리엄은 이 편지를 통해 프랑스가 즉각적으로 네덜란드를 침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9월 22일, 루이 14세는 프랑스 항구에 있는 모든 네덜란드 선박의 출항을 금지하였으나, 이는 단순한 경고에 불과했다. 9월 26일, 암스테르담 의회는 영국 침공을 공식 승인하였다. 루이 14세는 군대를 린을 지나 독일 안으로 이동시켰고, 윌리엄은 군대를 서쪽 해안에 집결시켰다. 9월 29일, 홀란트 주 의회는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1672년의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 공격과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윌리엄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2]
5. 윌리엄의 상륙
1688년 11월 5일(그레고리력 11월 15일), 윌리엄 3세의 군대는 데번주 브릭스햄 부근의 토베이에 상륙했다.[18] 윌리엄의 군대는 대략 15,000명 정도로, 보병, 기병, 포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영국 망명자들과 위그노들도 동행했다.[19] 윌리엄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수비적인 태세를 취했다. 이후 에크시터에 당도하였고, 많은 귀족들이 윌리엄을 지지했지만, 상당수는 사태를 관망했다.[11]
5. 1. 출항과 도해
윌리엄은 비밀 유지가 어려울 것을 예상하고 신속하게 병력과 물자를 수송선에 채웠다. 1688년 10월 10일, 윌리엄은 헤이그 선언서를 발표하여 자신의 군사 행동이 개신교와 자유로운 의회를 위한 것이라고 천명했다.[16] 10월 말이 되자 폭풍이 끝나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개신교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함대는 10월 28일 출항했다.[17]1688년 11월 5일(그레고리력 11월 15일), 윌리엄의 군대는 데번주 브릭스햄 부근의 토베이에 상륙했다.[18] 윌리엄의 군대는 대략 15,000명 정도로, 보병, 기병, 포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영국 망명자들과 위그노들도 동행했다.[19]
5. 2. 상륙과 진군

윌리엄은 자신의 군대가 제임스 2세의 군대에 비해 월등히 강력하다고 확신했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수비적인 태세를 취했다. 11월 9일(그레고리력 11월 19일) 윌리엄은 에크시터에 당도했다. 11월 12일이 되자 많은 귀족들이 윌리엄의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양 진영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사태를 관망했다.[11]
6. 제임스 2세의 몰락
제임스 2세는 토리당을 자기편으로 만들려 했으나 심사율 서명을 거부하여 실패했다.[11] 제임스 2세의 군대는 솔즈베리에 집결했고, 율리우스력 11월 19일 주력 부대가 합류했다.[11] 그러나 런던에서 일어난 반가톨릭 폭동으로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고, 충성심이 의심되는 장교들도 있었다.[11]
윈캔튼과 서머셋에서 소규모 교전이 벌어졌지만, 양측 사상자는 15명 정도였다.[11] 11월 23일 최고 사령관 루이 드 듀라가 윌리엄에게 투항했고,[11] 다음날 존 처칠, 26일에는 앤 공주가 투항하자 제임스는 런던으로 퇴각했다.[11]
11월 18일 플리머스가 윌리엄에게 항복했고,[11] 23일 윌리엄은 솔즈베리에서 왕의 자문위원회와 협상을 시작했다.[11] 제임스 2세는 자유 선거와 반역자 사면을 제안했지만, 이미 잉글랜드 통제력을 상실한 뒤였다.[11]
12월 11일 제임스 2세는 왕실 인장을 템스 강에 던지고 도망쳤으나, 페버세임 어부에게 붙잡혔다.[11] 같은 날 임시 정부가 구성되어 윌리엄에게 통치를 요청했다. 런던에서는 반가톨릭 폭동이 일어나 가톨릭 신자와 대사관이 약탈당했고, 아일랜드의 밤이라 불리는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11]
12월 16일 제임스 2세는 런던으로 돌아와 군중의 환호를 받았지만,[12] 윌리엄은 제임스가 왕권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윌리엄은 제임스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왕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12월 18일 제임스는 네덜란드 경비대와 함께 켄트로 갔고, 윌리엄은 런던에 입성했다. 12월 23일 제임스 2세는 찰스 1세처럼 처형될까 두려워 프랑스로 도망갔다.[11]
6. 1. 이어지는 투항

프랑스는 제임스 2세에게 원군 제공을 제안하였으나, 제임스 2세는 훗날 지불해야 할 대가를 염려하여 거절하였다.[11] 제임스 2세는 토리당을 자신의 편으로 돌려세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심사율에 대한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실패하였다.[11] 제임스의 선봉 부대는 솔즈베리에 집결하였으며, 제임스 2세는 율리우스력 11월 19일 자신의 주력 부대와 함께 합류하였다.[11] 제임스 2세의 군대는 19,000여 명의 병력이었다.[11] 제임스 2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런던에서는 반가톨릭 폭동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제임스 2세 군대는 많은 수가 전의를 상실하였다.[11] 그의 부대에는 충성심이 의심되는 상당수의 장교가 섞여 있었으나, 제임스는 그들에 대한 체포를 명령하지 않고 방관하였다.[11] 윈캔튼과 서머셋에서 작은 규모의 첫 교전이 발생했고, 제임스 군 측의 소수 정탐병이 윌리엄 측에 의해 격퇴되었으나 양측의 사상자 수는 15명 정도에 불과하였다.[11] 그러나 제임스 군측 장교들은 조짐이 좋지 않다고 여겼다.[11] 11월 23일 제임스 측의 최고 사령관 루이 드 듀라가 윌리엄 측에 투항하였고,[11] 그 다음날 사령관 중 하나인 존 처칠이, 26일에는 제임스의 딸 앤이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제임스는 런던으로 퇴각하고 말았다.[11]
11월 18일 플리머스가 윌리엄에게 투항하자 그는 진격을 시작하였다.[11] 23일 윌리엄은 솔즈베리에 당도하여 왕의 자문위원회와 협상을 시작하였다.[11] 제임스 2세는 자유로운 선거와 반역자에 대한 일반 사면을 제공하겠다고 하였으나, 이미 잉글랜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그의 이러한 제안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11]
6. 2. 제임스 2세의 도주와 체포
12월 11일 제임스 2세는 왕실 인장을 템스 강에 던져버리고 도망쳤으나 다음날 페버세임의 어부에게 잡혔다.[11] 같은 날 스피리처의 영주와 템포럴의 영주는 임시로 정부를 구성하고 윌리엄에게 통치를 요청하였다. 한편 런던에서는 반 가톨릭 폭동이 일어나 가톨릭 신자의 집과 여러 가톨릭 국가의 대사관이 약탈당했다. 가톨릭 교도인 제임스의 아일랜드 용병들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자 런던 시민들은 가톨릭 교도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력과 약탈을 행사하였는데, 이 사건을 아일랜드의 밤이라고 한다.[11]제임스 2세는 12월 16일 런던으로 돌아왔으며 군중들은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12] 제임스 2세는 이러한 환호를 보자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추밀원 위원들과 회동을 열었다. 그는 페버세임의 영주를 윌리엄에게 보내 협상을 계속할 의사를 전달하였다. 윌리엄은 제임스 2세가 더 이상 잉글랜드의 왕권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페버세임 영주가 당도하자 적잖이 당황하였다. 윌리엄은 제임스의 제안이 자신의 선언과 배치되고 아내와의 관계에 짐이 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는 제임스가 품고 있는 두려움을 이용하기로 하고 세 명의 옛 관료를 제임스에게 보내 윌리엄이 더 이상 왕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동시에 윌리엄은 모든 잉글랜드 군대에게 수도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고 어떠한 지방 군대도 1689년 봄까지는 수도로부터 약 32.19km 이내로 접근하지 못한다는 포고를 발표하였다. 잉글랜드 해군 역시 윌리엄의 지지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12월 18일 제임스는 스스로 네덜란드 경비대와 동행하여 켄트로 갈 수밖에 없었고 윌리엄은 런던에 입성하였다. 런던의 군중들은 오랜지색 옷을 입고 윌리엄을 환영하였다. 제임스 2세는 찰스 1세처럼 자신도 사형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네덜란드 장교들은 "제임스 2세가 원한다면 국외로 보내 줄 수 있다"는 제안을 하였고 제임스 2세는 12월 23일 아내가 있는 프랑스로 건너갔다.[11]
7. 윌리엄의 즉위
윌리엄은 12월 28일 정부를 재편하고 휘그당과 연합하여 임시 의원 대회를 개회하였다. 잉글랜드 왕좌는 공식적으로는 공석이었기 때문에 그는 의원 대회를 "의회"라고 부를 수 없었다. 윌리엄은 제임스가 힘을 길러 반격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는데, 잉글랜드에는 여전히 제임스 지지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2]
의원 대회는 왕위 이양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는데, 성공회의 저교회파인 휘그당은 윌리엄을 단독 국왕으로 옹립하기를 원했고, 휘그당 온건파는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의 국왕과 여왕으로 즉위하기를 원했으며, 토리당은 메리가 여왕으로 단독 집권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윌리엄과 메리는 공동 집권하기로 하고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와 잉글랜드의 메리 2세로서 즉위하게 된다.[12]
1689년 2월 13일 공동 군주인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의회로부터 처음에는 "불만사항 23조"로 불리던 1689년 권리장전을 전달 받고 이에 서명하였다. 이로써 영국의 왕권은 별다른 유혈 충돌 없이 이양되었다.[12]
1689년 2월 1일(1월 22일)에 가의회가 소집되어 향후 왕위 계승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의회는 처음에 메리 2세의 단독 즉위를 원했지만, 이미 런던을 장악하고 군사적으로 잉글랜드를 지배하고 있던 윌리엄 3세가 이에 불복하고, 메리 2세의 사촌이자 찰스 1세의 외손자인 자신도 왕위를 요구했기에, 결국 두 사람의 공동 통치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 총독직을 유지하면서 윌리엄 3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에 즉위하게 되었다.[13]
2월 23일(2월 13일),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즉위하면서 왕위에 대한 의회의 우위를 인정하는 「권리의 선언」에 서명하고, 같은 해 「권리장전」으로 발표했다. 함께 혁명의 공로자들에게 상이 주어졌고, 주요 인물들은 작위와 관직을 받았으며 토리당과 휘그당 당원들이 섞인 연립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한편, 상비군은 의회의 승인 없이 1년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종교적으로는 관용법에 따라 잉글랜드 국교회 이외의 프로테스탄트에게 일부 관용이 허용되었다.[13]
8.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저항
스코틀랜드는 윌리엄 3세의 상륙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1688년 11월까지 소수만이 제임스 2세를 지지했다. 1689년 3월에 열린 스코틀랜드 삼부회 선거에서는 장로교와 성공회가 교회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했다. 3월 16일, 제임스 2세의 편지가 삼부회에서 낭독되었는데, 복종을 요구하고 불복종에 대한 처벌을 위협하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일부 성공회 신자들은 삼부회 참석을 중단했고, 다른 일부는 편을 바꾸었다.[3] 1689년-1691년 자코바이트 봉기는 윌리엄 3세로 하여금 장로교도들에게 양보하게 만들어, 스코틀랜드에서 성공회를 종식시키고 정치계의 상당 부분을 배제시켰다.[4]
제임스 2세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고원지대, 잉글랜드의 지지자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들을 자코바이트(제임스당)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재커바이트의 반란을 준비했다.[1] 잉글랜드에서는 혁명이 거의 무혈로 성공했지만, 스코틀랜드 귀족인 던디 자작 존 그레이엄이 제임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제임스 2세가 프랑스 루이 14세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군을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하자,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에 호응하여 윌리엄 3세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690년 7월 1일, 보인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제임스 2세가 이끄는 프랑스-아일랜드 연합군을 격파하여 반란을 종식시켰다. 제임스 2세는 다시 프랑스로 도망쳤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위는 윌리엄 3세 부부에게 돌아갔다.[5]
9. 역사적 의의
1688년 명예 혁명은 영국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왕권과 의회의 갈등에 중요한 이정표가 된 사건이었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제임스 2세의 퇴위와 1689년 권리장전으로 인해 더 이상 군주의 절대적 권리에 대한 주장이 힘을 얻지 못하게 되면서 영국은 전제군주제와 결별하고 입헌군주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명예혁명은 근대 시민사회로 가는 데 기여했고 산업 혁명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유럽 내에서 시민사회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20]
명예혁명은 '''영광스러운 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고도 불린다. 이 혁명으로 영국에서 가톨릭 복권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잉글랜드 국교회의 국교화가 확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권리장전에 의해 국왕의 권한이 제한되고 영국 의회정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이후 수세기에 걸친 고난의 시작이었으며, 영국 국왕 및 그 배우자가 가톨릭 신자임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었다. 이 규정은 2013년 왕위 계승법을 통해 폐지되었다.
네덜란드 주도의 영국 침략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역사 해석도 있으며[8], 현재는 명예혁명이 내란과 외국의 침략이 병존한 “혁명”이며, 영국인의 자부심 및 개입한 네덜란드 정부의 정치적 의도 등으로 인해 외국의 개입 요소가 의도적으로 무시되어 왔다고 여겨진다.
권리장전 1689년은 공식적으로 입헌군주제 시스템을 확립하고, 군주가 의회의 동의 없이 법률을 정지하거나 세금을 부과하거나 왕실 임명을 하거나 평화시 상비군을 유지할 수 없도록 군주의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절대 군주제로 향하는 움직임을 종식시켰다. 영국 육군은 군주가 아닌 의회의 군사 조직으로 남아 있지만, 군주는 모든 군사 집행 권한의 근원이다.
대관 선서법 1688년에 따라 윌리엄 3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우위를 유지할 것을 맹세했는데, 그의 고국인 네덜란드 개혁 교회와 스코틀랜드 교회는 교리와 주교 사용 모두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심스러웠다. 특히 그는 가톨릭 동맹국인 스페인과 레오폴트 황제를 달래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종교적 유연성을 필요로 했다. 1688년 10월의 ''선언''에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법적 관용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은 국내 반대 때문에 실패했다. 관용법 1689년은 비국교도들에게 구제를 제공했지만 가톨릭 해방은 1829년까지 연기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Ireland's Protestant Ascendancy explained
https://www.britanni[...]
2024-06-05
[2]
논문
Jardine (2008) and Williams (1960)
[3]
서적
참석자 목록
[4]
논문
Goodlad (2007) and De Krey (2008)
[5]
논문
Vallance (2007)
[6]
서적
China's Revolution and the Quest for a Socialist Future
1804 Books
[7]
웹사이트
England's 17th Century Revolution by Karl Marx
https://www.marxists[...]
[8]
서적
世界の歴史17-ヨーロッパ近世の開花
中央公論新社
[9]
서적
인용 출처
[10]
서적
인용 출처
[11]
서적
인용 출처
[12]
서적
인용 출처
[13]
서적
인용 출처
[14]
서적
The Anglo-Dutch revolution of 1688-89
[15]
기타
[16]
서적
The Command of the Ocean: A Naval History of Britain 1649–1815
Penguin Group
[17]
서적
The Army, James II, and the Glorious Revolution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8]
서적
A Kingdom without a King: The Journal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the Revolution of 1688
Phaidon
[19]
서적
Restoring the Temple of Vision: Cabalistic Freemasonry and Stuart
Brill
[20]
서적
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
e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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